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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두려움을 깨닫다

오랫동안 다른 이의 심장을 기다려 온 환자가 있다. 심장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기에 언제 악화될지 모르는 병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드디어 기증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이식 대기 순서가 바뀌고, 환자는 어렵게 찾아온 새 생명을 다른 이에게 양보한다. 양보받은 환자 또한 아직 삶이 보장된 건 아니다. 복잡한 수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맡은 의사는 비장하다.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흐르고 차가운 메스가 피부를 가른다. 핏빛 근육과 은빛 수술 도구들이 부딪치는 긴박한 이미지가 이어진다. 마침내 수술을 마친 의사는 긴장된 눈빛으로 바이탈을 체크하다가 “심장이 뜁니다.”라는 말에 비로소 숨을 몰아쉰다.

장기이식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은 의학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 속에서 장기이식은 늘 긴박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지며 이야기의 재미와 장기기증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함께 전달한다. 하지만 TV를 끄고 돌아서면 감동은 옅어진다. 장기기증이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말 그대로 드라마 속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시각 디자이너인 최수진 씨도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의학 드라마를 즐겨 봤다. TV를 끄면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를 되새겼다. 삶의 끝자락에서 장기기증이 유일한 희망인 환자들의 간절함과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소중한 일부를 내어주는 사람들의 의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딜레마가 그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어 서약을 하려고 하자 망설여졌다. 두려운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인들만 행할 수 있는 멀고 위대한 일로 여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 보자, 펄떡거리는 장기의 선연한 이미지가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걸 깨달았다. 몸속의 장기가 꺼내어지는 상상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고 한 생명이 끝나야만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딜레마는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굳어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두려움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장기란 정말 두려운 것인지, 두렵다면 그 근간은 무엇인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디자인으로 의문을 풀어보고자 했다.

두려워 말고,

Fear not

그는 장기기증을 가로막는 장벽인 ‘두려움’으로부터 답을 찾았다.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목표였기에 두려워하지 말자는 의미의 ‘Fear not’을 프로젝트명으로 삼았고 이는 곧 다른 이의 생명을 ‘피어나’게 한다는 의미와도 닿아있었다. 수많은 습작 끝에 장기는 꽃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꽃은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소재다. 그러나 흔한 소재를 남다르게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인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장기를 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다가도 일어나 스케치를 했다. 꽃이면서 동시에 장기로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선 하나도 허투루 그릴 수 없었다. 너무 선명하면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들고 너무 흐리면 생기를 전달할 수 없기에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샘플을 뽑아보는 작업이 이어졌다. 가장 신경 썼던 건 무섭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서운지, 어렵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물어보며 그래픽 디자인에만 3개월이란 시간을 들였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학생이었던 그는 졸업전시회를 통해 장기와 꽃의 이미지를 적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작품 의도에 깊이 공감했다. 작품을 살 수 없는 걸 아쉬워하며 혹시 팔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번호를 남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반응은 텀블벅 펀딩으로 이어져 프로젝트가 사람들에게 직접 닿는 계기가 되었다. 리워드 중 가장 인기 있는 건 티셔츠였다. 처음엔 아름다운 꽃 자수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가, 심장을 표현한 거라고 얘기하면 그때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장기기증에 대해 한 번 더 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후원으로 마련된 기금을 장기기증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펀딩을 진행하는 중 주변의 추천으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이미지가 담긴 책자를 보완하고, 사람들과 더욱 긴밀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을 추가해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레드닷 디자인 컨셉어워드 교육 분야의 본상을 받았다. 언어와 환경은 달랐지만, 심사위원들은 장기기증에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 공감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그의 프로젝트를 혁신적으로 평가했다. 한 사람의 작은 생각에서 비롯된 씨앗은 졸업 전시회에서 텀블벅으로, 레드닷 어워드로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일

식물은 의도가 없다. 자연스럽게 생명이 싹트고 특정한 목표에 따라 꽃피우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생명력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티프로서의 ‘꽃’은 ‘생명’이라는 장기의 본질을 가장 잘 일깨워주는 소재였다.

디자인에서 가장 우선시되었던 건 꽃으로 ‘어떻게’ 장기를 표현할까였다. 장기들은 언뜻 보기에 그저 비슷한 근육 덩어리 같지만, 역할에 따라 형태와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장기를 표현할 적절한 꽃과 그래픽 디자인을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가장 먼저 작업한 심장은 팽팽한 근육에 둘러싸인 둥근 형태의 장기였다. 피어나되 둥그렇게 감싸는 형태를 유지하고 꽃잎과 줄기가 단단한 작약이 심장의 모티프가 되었다. 구불구불한 소장은 기다란 넝쿨에 달콤한 꽃을 피워내는 스위트피로, 둥글둥글한 작은 알갱이가 쌓여있는 듯한 췌장은 소담스러운 꽃송이가 모인 프리지아로 다시 태어났다. 각막은 홍채를 중심으로 섬세한 꽃잎이 펼쳐지는 양귀비로 표현되었다. 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두 개의 꽃송이로, 신장은 쌍둥이처럼 나란히 등을 맞댄 데이지로, 간은 매끈한 튤립으로 피어났다.

장기기증 프로젝트의 메인은 꽃이지만 각각의 꽃을 씨앗의 이미지로 표현하기도 했다. 씨앗은 작은 봉투의 겉면에 프린트되어 있다. 봉투를 펼치면 씨앗으로부터 피어난 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는 장기기증 카드가 담겨있다. 생명의 근원인 씨앗은 기증 전 아직 우리 몸에 머물러 있는 장기를 뜻한다. 봉투가 펼쳐짐은 내 몸의 씨앗이 다른 사람의 몸에 또 다른 삶을 꽃피울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 모두 타인의 생명을 꽃피울 수 있는 소중한 씨앗을 가지고 있다. 장기기증은 특별한 사람만이 행하는 선행 같지만, 모두 공평하게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보통 사람들의 선행’일지도 모른다.

디자인의 본질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

장기기증 프로젝트 Fear not은 장기라는 이미지를 거부감 없이 드러냈다는 데에만 의미가 있지 않다. 기존의 장기기증 캠페인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의식해 ‘숭고함’ ‘희생’과 같은 관념적인 가치 중심으로 홍보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기증은 장기를 이식받는 사람뿐 아니라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에게도 그 가치가 피부로 와 닿아야 지속될 수 있다. 그렇기에 Fear not 프로젝트는 꽃을 통해 사람들이 장기기증을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정의를 내려보길 권하고 있다. 장기기증이 나라는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나눔은 그 의미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흔히 디자이너는 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조금 남다르다. 하나의 선을 그리더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디자인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목표와 가치를 분명하게 담아낼 수 있을 때 디자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디자인은 공허하다. 치열한 고민이 담긴 결과물만이 결과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디자인이 꼭 아름다워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다. 때로 디자인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세 개의 심장 아래 White, Black, Yellow 라는 글자를 넣어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광고 디자인처럼, 디자인은 톡 쏘는 한마디가 될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피하고 싶은 문제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하고 그것을 내가 정의한 나만의 가치로 만들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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