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

8

5

당신이 아는 그 음악은

재즈였다

‘재즈’라는 낱말 뒤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따라온다. 고급 와인, 세련된 인테리어와 어두운 조명으로 꾸며진 바(bar), 느리고 난해한 선율. 재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을 갖춰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재즈는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 있는 음악이다. 레이 찰스(Ray Charles)의 <힛 더 로드 잭(Hit The Road Jack)>과 로라 피지(Laura Fygi)의 <아이 러브 유 포 센티멘털 리즌(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처럼 광고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팝 같은 노래들은 사실 재즈다.

흥행했던 음악 영화에서도 재즈를 만날 수 있다. 재즈는 어딘가 끈적한 음악이라는 인식과 달리 영화 <위플래쉬(Whiplash)>에서는 광기어린 드럼 연주를, <라라랜드(La La Land)>에서는 로맨틱한 피아노 선율을 통해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펑크, 레게, 리듬 앤 블루스, 라틴 소울, 심지어 힙합도 재즈에 영향을 받아 파생된 장르다. 재즈의 특징은 즉흥 연주다. 예정되지 않은 코드 진행이 또 다른 코드 진행으로 뻗어 나가듯, 재즈의 마디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는 여러 형태의 음악과 선율로 이미 우리 주변에 있던 것이다. 어렵다는 이유로 대중에게 외면받아왔던 재즈는 생명력 강한 나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새잎을 틔우고 있었다.

재즈가

뿌리를 내리는 곳

아무리 생명력 강한 나무라도 성장의 근본이 되는 뿌리가 있어야 자라날 수 있다. 인천 신포동의 버텀라인은 35년째 인천 재즈의 뿌리가 되어주고 있는 공간이다. 지금의 장소가 맨 처음부터 버텀라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버텀라인이 있는 건물은 1890년대 중반 잡화를 파는 후루다 양품점이었다. 세탁소, 교회, 가정집이기도 했던 건물이 마지막으로 ‘버텀라인’이란 간판을 단 건 1983년. 좁은 계단을 지나 문을 열면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꿈처럼 열리고, 어두운 조명과 LP를 통해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이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세련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재즈의 성지였다. 허정선 대표 또한 처음엔 이곳에 매료된 손님이었다. 그는 20대 시절 아지트가 되어준 버텀라인을 막연히 마음에 품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인수하였다.

그가 이곳을 맡은 후 공간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소리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테이블마다 있던 칸막이를 없애고, 창문을 만들어 밀폐된 공간에 바깥 풍경을 들였다. 가장 큰 변화는 무대가 생긴 것이다. 당시 홍대를 중심으로 라이브 클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천에도 수많은 음악 카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라이브 하는 곳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손님으로 오던 재즈 뮤지션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버텀라인에서도 라이브 공연을 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최초의 공연이 재즈 피아니스트 1세대인 신관웅 선생님과 13인조 빅밴드의 공연이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홀을 가득 메운 그 날의 광경은 버텀라인 라이브 공연 역사의 첫날이었다. 그즈음 인천 재능대학에 재즈 학과가 생긴 것도 버텀라인에는 운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공연을 해도 되겠냐며 기타를 메고 찾아온 한 학생을 시작으로 재즈 학과 학생들의 정기 공연이 시작됐다. 그렇게 뮤지션과 학생들의 공연장이 된 낡은 건물은 라이브가 이어지며 숨겨뒀던 가치를 발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울림은 콘크리트 건물이 주는 그것과는 다르다.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만든 벽이 소리를 적당히 흡수해 듣기 좋게 만들고, 서까래가 노출된 높은 천정이 울림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버텀라인이 있는 건물은 이미 100년이 넘어 한 해 한 해 지나는 세월만으로 그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재즈를 만남으로써 더 이상 낡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오래된 공간에서 오래된 음악을 듣는다는 것, 비록 신식 건물도 최신 음향기기도 없지만 버텀라인에는 오래된 것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가지를 뻗어 열매를 맺다

최근의 공연에서도 이런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지난 12월에 열린 이탈리아 재즈 피아니스트 니콜라 세르지오(Nicola Sergio)의 단독 공연이 큰 반응을 얻었다. 데뷔 앨범부터 주목받아 이탈리아 재즈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는 뮤지션이지만, 밴드가 아닌 솔로 연주자의 공연은 처음이었던 버텀라인에서 그의 공연은 색다른 도전이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80분으로 예정되었던 공연 시간을 훌쩍 넘기며 피아노 소리 하나만으로 관객과 뮤지션 모두가 몰입하는 경험을 이루어냈다. 이날 니콜라 세르지오의 공연은 그의 내한 공연 중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이 밖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프랑스 국민 베이시스트 앙리 텍시에(Henri Texier) 등 유명 뮤지션이 버텀라인에서 공연을 펼쳤다. 버텀라인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라이브 공연이 열린다. 가격은 공연에 따라 다르지만 사람들은 액수에 상관없이 열광한다. 이곳이 전문 공연장이 아닌 클럽이란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라이브를 기대하며 찾는지 알 수 있다.

버텀라인을 통해 발돋움하는 뮤지션들도 있다. 공연이 하고 싶어 기타를 메고 찾아왔던 소년은 벌써 몇 장의 앨범을 낸 어엿한 뮤지션이 되었다. 통통 튀는 스윙 리듬의 재즈를 선보이는 밴드 유월(流月)도 있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첫 싱글을 낸 따끈따끈한 신예 밴드다. 재능대 학생에서 뮤지션이 되기까지 그들의 성장을 지켜본 허정선 대표는 볼때마다 느는 실력에 뿌듯함을 느낀다. 한때 손님이었던 최용민, 송석철, 색소포니스트 남진우와 같은 뮤지션들은 현재 인천 재즈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버텀라인에서 꿈을 키운 사람들이 재즈계를 확장시키는 뮤지션이 된다는 건 흩어져 있던 음표를 모아 선율을 만들고 음악이란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재즈라는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은 관객이다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현실적 문제로 음악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 있다. 재즈 뮤지션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계속 나아갈 힘을 주는 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관객의 함성이다. 실제로 허정선 대표의 지인이었던 한 뮤지션은 음악을 그만둘까 고민하던 중 버텀라인에서 공연할 것을 요청 받았고 박수치고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힘을 얻어 돌아갔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뮤지션들도 마찬가지다. 큰 무대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일수록 관객과의 호흡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그들에게 버텀라인에서의 직접적인 교감은 음악을 하는 이유를 다시금 되새겨준다.

재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감’이다. 연주자와 악기와 관객이 하나 되어 교감하는 지점이 진짜 재즈가 탄생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음표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호흡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닐 뿐이다. 하지만 재즈가 특정 사람들만 즐기는 고급 음악이란 편견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재즈가 들어온 지 몇십 년이 지났지만 쉽게 깨지지 않는 편견이다. 버텀라인을 방문 한 몇몇 손님들은 여전히 잘 몰라서,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라며 즐기기를 망설인다. 그럴 때 허정선 대표는 반문한다. “조용필, 이문세의 노래는 공부하고 들으시나요?”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Malo) 또한 “공부는 우리가 할 테니 여러분은 듣기만 하세요.”라고 이야기한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저마다 다른 문양을 남긴다. 한 소절을 듣더라도 100명이면 100개의 그림이 그려진다. 혹시 재즈를 듣는다면, 그 선율이 마음에 들어와 어떤 모양으로 뻗어 나가는지 가만히 들여다보자. 악기와 목소리와 리듬이 자유롭게 그려내는 그림을 그대로 두어 보자. 어쩌면 재즈가 자랄 수 있는 진짜 토양은 무대도 공간도 아닌, 재즈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당신의 마음일 것이다.

한국 재즈 역사의 울림이 있는 그곳, 버텀라인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을 적어주세요.